클래식과 모던의 직조를 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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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TREND

클래식과 모던의 직조를 입다

 

클래식과 모던의 직조를 입다

영원한 브리티시 헤리티지 BARBOUR

 

 

글. LABEL 홍현지 플래너

 

온 도시가 물기를 머금고 채도가 낮아지는 날이면 나는 대학 시절 세 계절을 보냈던 영국을 떠올린다. 직물 사이사이 스멀스멀 스며든 습기, 눅눅한 코트에 어쩔 수 없이 팔을 넣어야 했던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경험, 덜 마른 이불 속 같았던 도시의 안개. 영국의 날씨란 소문대로 대부분 그렇게 축축하고 눅눅한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뭐 그런 날씨에도 컬러풀하게 차려입은 길거리 패셔니스타도 있었지만...) 내 주위에는 우중충한 컬러의 자켓 하나를 목 끝까지 잠근 채 휘적휘적 다니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당시엔 그런 컬러라던가, 반질반질 왁싱된 옷의 질감, 여기저기 달린 포켓들이 어찌나 투박해 보이던지. ‘영국인은 실용을 위해 패션을 포기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영국의 패셔니스타 알렉사 청의 파파라치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야말로 컬처 쇼크.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장화 위로 무심하게 툭 매치한 왁스 자켓이 그렇게 멋스러울 줄이야. 촌스럽게만 보이던 투박함이 멋으로 보인 순간이었다. 컨트리웨어가 이토록 쿨한 아이템이었다니. 아마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바버 자켓과 사랑에 빠진 게.


 

 바버의 역사: 127년 고집이 전통이 되다 

 

바버는 1894년 영국 북동쪽에 위치한 사우스 실드에서 존바버가 시작한 브랜드로 현재까지 5세대에 걸쳐 패밀리 비즈니스로 운영 중이다. 처음에는 변덕스러운 영국의 악천후 속에서 일하는 어부, 공장 노동자 등의 직업군을 위한 방수 의류를 판매하는 상점으로 출발했다. 이후 더 가벼운 면 소재에 왁스를 덧칠해 방수와 방풍 기능을 향상시킨 왁스 재킷을 개발하게 되었다. 두 차례의 큰 전쟁을 겪으며 방수 자켓에 대한 수요가 늘어 바버의 인지도가 높아졌고 더불어 1960년 당대 최고의 스타 스티브 맥퀸이 바버의 인터내셔널 재킷을 입으며 인기는 고공행진. 이후 승마용으로 디자인된 비데일, 사냥용 재킷으로 만들어진 뷰포트 등 라인업을 넓히며 기능성과 스타일을 동시에 잡은 브랜드로 자리잡게 되었다.

 

 

클래식 왁스 자켓은 여전히 사우스실 드 지역에서 수작업 공정으로 생산되어 엄격한 품질관리를 거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바버의 장인 정신은 영국 왕실에서 Royal Warrant(영국 내에서 생산하는 제품 중 뛰어난 품질과 정통성을 가진 브랜드에 수여)를 3개나 수여받을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바버는 영국 왕실이 사랑하는 브랜드로 꾸준히 왕세자비들의 선택을 받아왔을 뿐만 아니라 알렉사 청, 이효리 등 많은 셀러브리티가 선택한  브리티시 헤리티지 로 12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바버의 클래식 비데일: 빛바랠수록 빛나는  

 

사실 바버의 계절이 오면 나는 조금 두렵다. 워낙 인기가 많은 모델을 소유 중인지라 지하철에서 의도치 않게 옆 사람과 커플룩이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손이 가게 되는 건, 그 멋스러움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바버’하면 떠오르는  왁스 재킷 비데일 은 1980년대 승마용으로 만들어진 자켓이다. 바버 회장 마가렛 여사가 디자인한 것으로 짧고 마모에 강하며 큼지막한 벨로즈 포켓이 양옆에 있어 실용성을 챙긴 것이 특징이다(개인적으로 추울 때는 큰 포켓 위에 달린 몰스킨으로 덧대진 핸드워머 포켓에 손을 넣곤 한다). 거기에 바버의 아이코닉한 큼지막한 금색 지퍼와 코듀로이 카라가 클래식한 멋을 완성한다.

여기에 사실 이 왁스 재킷은 세탁하지 않아도 1년에 한 번씩 왁스만 덧발라주면 대대로 물려 입을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한 데 왁스 칠 후 반질거리는 느낌보다 빛바랜 질감의 바버가 더 좋아서 왁스 칠을 수년째 미루고 있다(꼭 귀찮아서가 아니다).

입으면 입을수록 더해지는 빈티지한 느낌이,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는 클래식함이,

지하철에서, 회사에서 강제 커플룩이 되는 민망함을 

이길 정도로 매력적이다. 

 

 바버의 진화: 클래식은 영원하다, 그러나 영원한 클래식은 없다 

 

클래식하다는 건 불변의 가치의 ‘고전미’, ‘헤리티지’를 가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클래식이 Old fashioned가 되는 것도 한 끗 차.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클래식도 시대의 흐름을 타야 한다.

 

그런 면에서 바버는 브리티시 클래식의 왕좌를 유지하기 위해 백조처럼 물밑으론 부지런히 발을 굴린다. 과거 노동자들을 위해 작업용 방수 재킷을 만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닌 모터사이클 라이더를 위한 자켓, 승마용 자켓, 사냥용 자켓으로 라인업을 확장한 것도 바버의 신의 한 수였다.

 

최근에는 #BarbourWayOfLife 해시태그 캠페인을 통해 바버를 입는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과 철학을 공유하고 확장하며 소비자들과 함께 브랜드의 가치를 새롭게 구축해 나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부쩍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 커진 요즘 트렌드를 반영한 듯 @Barbourdogs라는 깜찍한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며 가슴으로 낳아 지갑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애견인들의 마음까지 훔치고 있다. 이렇게 본연의 헤리티지를 지켜내면서도 시대에 따라 새로움을 더하며 진화하고 있으니, 바버라는 이름의 클래식은 영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바버를 입는 사람에게 환상이 있다. 바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클래식의 가치를 소중히 여길 줄 알고, 그때그때 바뀌는 패스트패션이 아닌 슬로 패션의 미덕을 이해하고 멋에 대한 자기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을 것만 같다. 사실 그게 내가 바버를 입는 이유고, 사랑하는 이유고, 훗날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싶은 이유고! 3세대를 걸쳐 물려줬다는 영국의 누군가처럼 나도 훗날 이 가치를 아는 누군가에게 나의 사랑스러운 바버들을 물려주고 싶다. 어쩌면 바버라는 이름으로 내가 남기는 ‘밈’일지도. 아무튼, 아무튼, 아무튼! 빨리 다시 찬 바람이 쌩쌩 불었으면 좋겠다. 그럼 난 여름잠에 빠졌던 바버를 옷장에서 깨우며 이러겠지.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 봐라, 내가 술 사 먹나, 바버 꺼내 입지!”

 

 

 

 

 

 

*이미지 출처: Barbour official (https://www.barbour.com/)